부케야시키
이시구로 가문 저택
1809년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시구로 가문 저택은 일반 대중에게 개방된 가쿠노다테의 사무라이 역사유적 지구 내 여섯 개 저택 중 가장 일찍 만들어졌습니다. 가문의 후손이 현재까지 생활하고 있는 유일한 저택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택의 절반만이 일반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이시구로 가문은 1853년 7,000 간몬(또는 700만 몬에 해당. 당시 목수 일당이 약 430몬)의 금액을 지불하고 이 저택을 구매했습니다. 해당 저택은 보존 상태가 양호한 상류층 사무라이 가문의 저택이며 건축의 특징 중 다수가 당시의 사회적 관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택에는 세 개의 출입문이 있습니다. 현재 방문객들이 사용하는 문은 원래 사무라이 전용으로 사용되었고,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오른편의 옆문으로 출입해야 했습니다. 왼쪽에 있는 문은 결혼식과 장례식 등 특별한 행사에만 사용합니다. 자시키라고 불리는 방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다다미가 평행으로 배치되어 있어 손님들은 다다미의 가장자리 천을 피해(금기시하던 것) 앉을 수 있습니다. 손님의 좌석 위치는 계급에 따라 정해집니다. 가장 높은 지위의 손님이 문에서 가장 먼 곳에 앉습니다.
본채 뒤에는 열린 공간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1870년부터 1950년까지 이곳은 이시구로 가문에서 땅을 빌려 소작하는 농부들의 쌀 가격을 책정하고 기록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열린 공간은 창고 두 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고는 본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겨울에도 출입이 쉽습니다. 이곳에 의학서, 검, 갑옷 등 이시구로 가문이 사용했던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시구로 가문의 역사
1500년대 사무라이였던 이시구로 가문은 이시구로 나오유키(생몰연도 미상)를 따라 엣추 지역(현재 도야마현)을 떠나 데와 지역(현재 아키타현)으로 이주했습니다. 이곳에서 나오유키는 이시구로 가문의 가쿠노다테 방계로 독립했고, 그의 아들인 나오키(생몰연도 미상)는 이시구로 가문에서 최초로 사타케-기타 사무라이 가문의 가신이 되었습니다. 사타케-기타는 도쿠가와 막부(1603~1868년) 시기 가쿠노다테를 200년 이상 통치했습니다.
이시구로는 사타케-기타 가문의 회계 및 자산, 감정평가 담당으로서 가쿠노다테의 재정을 관리했습니다. 막대한 부와 토지를 소유한 상류층 가문인 이시구로 가문은 메이지 시대(1868~1912년) 사무라이 계급이 몰락할 때에도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1800년대 말부터 1950년대까지 이시구로 가문은 소작농에게 농지를 빌려주고 연간 쌀 수확량의 1퍼센트를 받았습니다.
이시구로 가문의 많은 사람들이 무술에 능했을 뿐 아니라, 유교와 중국 경전, 수학, 천문학, 의학 등 다른 부문에서도 뛰어났습니다. 사무라이 계층은 전쟁이나 기근, 기타 위기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시구로 가문은 천문학과 의학에 대한 서적을 수집하여 인근 주민들의 질병을 진단하거나 진료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시구로 가문의 후손인 다카하시 규자부로(생몰년도 미상)는 최초로 천연두 백신을 아키타현에 소개한 의사입니다.

-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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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오후 5시
연중 휴가 없음
- 요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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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고중 학생 400엔, 중학생 200엔
단체는 어른, 고중 학생 300엔, 단체 중학생 150엔
※단체는 20명 이상※단체는 20명 이상
- 장소
- 카쿠노다테마치 오모테마치 시모쵸 1
- 문의처
- 이시구로가:0187-55-1496
- 교통 액세스
- JR카쿠노다테역에서 도보로 20분정도 걸림
아오야기 저택
아오야기 저택은 에도 시대(1603~1867년)에 지어졌으며 엄격한 계급 구분을 잘 보여줍니다. 당시 사회는 사무라이, 농부, 장인, 상인 등 크게 네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주택은 사회적 계급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아오야기 저택의 건축적 특징만을 검토한 후, 역사가들은 이곳이 상급 사무라이의 거주지라고 결론내렸습니다.
농부들은 초가지붕을 얹은 단층집만을 지을 수 있었고 정문이나 현관은 둘 수 없었습니다. 상인들은 작은 부지에 서로 인접한 2층 건물을 지을 수 있었고, 거리와 연결된 좁은 정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무라이 저택은 대규모 부지에 짓고 정문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출입문은 각 가문이 지닌 지위를 반영해 만들어졌습니다. 아오야기 저택은 1헥타르 이하의 토지(국제 럭비 경기장 크기에 해당)를 점유하고 있으며, 정문은 목수 시바타 이와타로(생몰연도 미상)가 1860년 야쿠이몬 양식으로 만들었습니다.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기 때문에, 이러한 양식으로 문을 만들기 위해서 가문은 번주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문에는 박공지붕(배 모양의 지붕)을 올리고 금속으로 장식했습니다.
문의 왼쪽에는 내부의 사람들이 들키지 않고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무사의 창문(무샤마도)’이 있습니다. 정문 현관의 천장은 낮습니다. 이는 암살자가 들어왔을 때 쉽게 칼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격자창을 두어 손님이 본채에 도착하기 전 가족들이 손님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방에서 2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숨겨진 계단 등 저택에서는 방어 목적의 특징들이 발견되며, 이는 아오야기 가문이 현재 아키타현과 이와테현의 경계 지역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아오야기 가문의 역사
16세기 말, 아오야기 가문은 아시나 가문의 가신이었습니다. 아시나 가문은 히타치 지방(현재 이바라키현의 일부)을 통치하던 다이묘의 가문인 사타케 가문을 섬겼습니다. 160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년)가 사타케 가문을 아키타 지역(현재 아키타현의 일부)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듬해 이에야스는 일본을 통일하고 최초의 도쿠가와 쇼군이 되었습니다. 아시나 가문은 사타케 가문을 따라 아키타로 이동했고, 아오야기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시나 가문은 1656년 사타케 가문의 사타케-기타 방계가 가쿠노다테로 올 때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습니다. 사타케-기타 가문을 섬기던 아오야기 가문은 현재 아키타와 이와테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경계를 지키는 군대를 지휘했습니다. 가문은 이러한 역할을 200년이 넘도록 수행했습니다. 1860년 아오야기 가문은 아키타 지역에서의 공헌을 인정받아 야쿠이몬 양식의 매우 화려한 문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문은 아오야기 가문의 자랑스러운 영광의 상징으로서 그들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여줍니다.
아오야기 가문이 처음으로 가쿠노다테에 왔을 때 이들은 매년 45~60고쿠의 쌀을 받는 중간 계급 사무라이였습니다. 고쿠는 성인이 일 년 동안 소비하는 쌀의 양(약 150kg)에 해당하며, 사무라이에게 지급되는 비용의 기본 단위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시대(1603~1867년) 말에 이르면, 아오야기는 매년 200고쿠를 수령했습니다. 이는 약 250년의 평화 기간 동안 토지를 구매했기 때문입니다. 큰 부를 이룬 아오야기 가문은 이후 사무라이 계급이 사라지고 다수의 사무라이 가문이 빈곤층으로 전략해 자산을 팔아야 했던 산업 성장기에도 수십 년 동안 번성했습니다.

-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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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1월까지) 오전 8시 30분 ~오후 5시
(12월~3월까지) 오전 9시~오후 4시
연중 휴가 없음
- 요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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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500엔, 고중, 초중 학생 300엔, 소학생 200엔
단체는 어른 450엔, 고중, 초중 학생 250엔, 단체 소학생 150엔
※단체는 20명 이상
- 장소
- 카쿠노다테마치 히가시 카츠라쿠쵸 26
- 문의처
- 아오 야기케:0187-53-2006
- 교통 액세스
- JR카쿠노다테역에서 도보로 20분정도 걸림
구 마쓰모토 가문 주택
마쓰모토 주택은 에도 시대(1603~1867년) 하급 사무라이 저택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에도 사회에서 상급과 하급 사무라이의 생활은 매우 달랐습니다. 상급 사무라이는 다이묘를 직접 모시며 가신을 둘 수 있을 정도의 부유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급 사무라이는 보통 수비병, 배달원, 단순 행정직 등으로 일하며 매우 적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성과 가까운 곳일수록 고위층 가문이 거주했고 각 가문의 지위는 저택의 설계와 자재 선정 모두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비토마치 지역에 위치한 마쓰모토 저택은 사무라이 저택으로는 작은 규모입니다. 가쿠노다테 상급 사무라이 주거지의 특색인 정문과 검은 담장도 없습니다. 대신 나무 기둥 두 개와 소박한 덤불 담장이 있습니다. 본채가 초가지붕으로 덮여 있고 총규모는 91제곱미터 정도입니다. 주택을 방문한 손님은 공식 접객실인 자시키로 연결되는 작은 별채를 통해 거실로 들어갑니다. 별채의 차양은 삼나무 지붕널에 돌을 얹어 만들었습니다. 저택의 뒷부분에는 원래 가족 침실이 있었습니다.
현재 마쓰모토 주택은 역사가 200년에 이르는 민속공예인 이타야자이쿠 시연 장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타야자이쿠는 이타야 단풍나무(고로쇠나무) 껍질을 엮어 바구니, 상자 등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이타야자이쿠를 비롯한 각종 공예는 가쿠노다테 하급 사무라이들의 중요한 추가 수입원이었습니다.
마쓰모토 가문의 역사
마쓰모토 가문은 교육 수준이 높지만 지위는 낮은 사무라이 가문으로 원래 히타치 지방(현재 이바라키현의 일부) 출신입니다. 그들은 주군인 이마미야 가문을 따라 에도 시대(1603~1867년) 초 가쿠노다테로 왔습니다. 이마미야 가문은 토착 신앙인 슈겐도 수행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마쓰모토 가문이 처음 가쿠노다테로 왔을 때, 그들은 이마미야 가문의 다른 가신들과 함께 다마치 지역에 거주했습니다. 그러나 성 인근 마을의 통치권이 사타케-기타 가문으로 넘어가자, 이마미야 가문은 아키타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고 이마미야 가문을 섬기던 가신들은 새로운 주군을 섬겨야 했습니다. 따라서 마쓰모토 가문은 다른 대부분의 가신들과 마찬가지로 사타케-기타 가문을 섬기게 되었고 신분과 임금 및/또는 직업에 따라 가쿠노다테 곳곳으로 이주했습니다. 현재 마쓰모토 저택은 고비토마치에 있습니다. 이곳은 물자를 운송하거나 소식을 전달하는 등의 잡다한 업무를 하는 하급 신하(고비토)들이 거주하던 곳입니다.
17세기와 18세기에 신분이 낮은 어린이들도 데라코야, 즉 ‘사원 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데라코야는 불교 사원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지역 내 일반 주거지에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일차적 목표는 어린이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마쓰모토 가문의 구성원인 스도 한고로(1775~1851년)는 가쿠노다테의 데라코야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고 직접 교과서인 에보시오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교재는 지리, 역사, 문화, 사회 예절, 요리 등 일상의 기초적 지식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기억하기 쉽도록 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교과서는 가쿠노다테의 과거를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 공개(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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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11월 중순까지
- 장소
- 카쿠노다테마치 코비토마치
- 문의처
- 셈보쿠시 산업 관광부 관광과:0187-43-3352
- 교통 액세스
- JR카쿠노다테역에서 도보로 20분정도 걸림
이와하시 저택
이와하시 저택은 전통적 일본 가옥이 자연재해로부터 거주자를 어떻게 보호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입니다. 건물 중앙에서 하중을 지탱하는 서까래가 둥근 돌 위에 위치해 진동을 받으면 같이 흔들리는 내진 구조입니다. 저택은 1900년 화재 당시 가쓰라쿠초 동쪽에 잔존한 건물 단 두 채 중 한 채입니다. 초가지붕이 아닌 나무판자로 만든 지붕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지붕널의 표면적이 작고 수분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불이 붙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와하시 저택의 주요한 방은 현관(겐칸), 거실(자시키), 안방(오카미), 창고(난도) 등 네 개입니다. 겐칸은 집으로 들어가는 주된 출입 통로로 손님을 위한 출입문과 가족들이 사용하는 출입문으로 구분됩니다. 손님이 출입하는 문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인 거실과 연결되어 있으며 정원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공간은 미닫이문으로 분리됩니다. 가쿠노다테의 다른 사무라이 저택 대부분은 폭풍우 시 닫는 덧문이 설치되어 있고 지붕을 덮은 외부 복도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하시 저택의 복도는 집 외부를 둘러싸며 개방형입니다.
오카미는 저택 중심부에 위치해 저택의 주인은 정문 현관을 포함한 모든 방을 볼 수 있습니다. 주된 생활 공간보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저택의 뒷부분이 주된 생활 공간에 해당하며, 가족의 의복과 각종 귀중품을 보관하는 난도 역시 이곳에 위치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와하시 가문은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을 분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에도 시대(1603~1867년)와 같은 계급 사회에서는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이와하시 가문의 역사
이와하시는 무쓰 지방(현재 후쿠시마현 일부) 아이즈 출신의 중간 계습 사무라이 가문입니다. 이와하시 가문의 사무라이들은 전투 기술로 유명했고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다양한 전장에서 수많은 공훈을 인정받았습니다. 가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이와하시 야에몬(생몰연도 미상)이 1584년 누마지리 전투에서 세운 공훈을 치하하기 위해 그에게 보낸 문서입니다.
이와하시 가문은 원래 아시나 가문의 가신이었습니다. 아시나 가문은 4세기 동안 아이즈를 통치한 사무라이 가문입니다. 강한 사무라이 장수였던 다테 마사무네(1567~1636년)에게 1589년 대패하자, 아시나 가문은 히타치 지방(현재 이바라키현 일부)으로 도망쳐 친척인 사타케 요시노부(1570~1633년)에게 의탁했습니다. 이후 이와하시 가문은 아시나 가문을 따라 고향인 아이즈를 떠나 히타치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유혈 분쟁이 일어나 이와하시 가문은 다른 곳으로 도망쳐 새로운 주군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와하시는 에도사키에서 이와키, 에도, 히로사키 등 북동부 혼슈를 떠돌며 주군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이와하시 마타에몬(1651년 사망)은 아키타의 가쿠노다테에 정착했습니다. 이곳에서 마타에몬은 이와하시의 전 주군인 아시나 가문의 혈통이 끊길 때까지 이들을 섬겼습니다. 당시 셋푸쿠, 즉 자결하는 관행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마타에몬은 주군을 따라 죽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다른 가신들은 명예를 지키려는 마타에몬의 결의에 감동했고, 이와하시 가문의 남은 후손들은 마타에몬의 행동에 대한 처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200년 동안 이와하시 가문은 가쿠노다테에 남아 아시나 가문 대신 사타케-기타 가문을 섬겼습니다. 메이지 시대(1868~1912년) 초 사무라이 계급이 무너지자, 이와하시는 사무라이라는 신분을 잃었지만 부유한 니시노미야 가문의 아들을 입양하여 가쿠노다테 지역사회에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 공개(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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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11월까지 오전 9시~오후 4시 30분까지
- 장소
- 카쿠노다테마치 히가시카츠라쿠쵸
- 문의처
- 셈보쿠시 교육위원회 문화재산과:0187-43-3384
- 교통 액세스
- JR카쿠노다테역에서 도보로 15분정도 걸림
가와라다 저택
가와라다 저택의 본채는 약 130년 된 건물이지만 야쿠이몬 양식의 정문은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볼 때 가와라다 가문의 이전 저택에서 이축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에도 시대(1603~1867년)의 계급에 따르면, 정문 등 특정한 건축 요소는 각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며, 가문의 명예와도 관계가 깊었습니다. 1910년대 가와라다 가문은 가쿠노다테에 전기를 도입했고 도시 최초로 전화번호를 받았습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정문에 붙어 있는 문패입니다.
가와라다 저택은 1900년 화재 당시 가쓰라쿠초 동쪽에 잔존한 주택 단 두 채 중 한 채입니다. 화재는 일반 서민과 상인들이 거주하던 가쿠노다테 아래 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둑 너머의 성 주변 마을까지 번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길을 잡기 위해 달려와 가와라다 저택의 초가지붕을 해초로 덮어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후 지붕을 함석 골판으로 교체했으나 저택 남쪽에는 화재로 인해 불에 탄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가와라다 가문은 예술을 후원했습니다. 저택 앞쪽에 있는 방에는 족자, 서예 액자, 병풍 등이 놓여 있으며, 미닫이문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 화가였던 히라후쿠 스이안(1844~1890년)과 햐쿠스이(1877~1933년) 등 지역 작가의 그림으로 장식했습니다. 가와라다 가문이 손님을 맞이하는 거실에서는 나무, 바위, 이끼로 꾸민 건식 정원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저택의 뒷부분은 비교적 소박합니다. 쌀 저장고는 후에 가문의 역사와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가와라다 가문의 역사
가와라다 가문은 학자, 정치가, 기업가 등 현재 센보쿠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영향력 있는 가문입니다. 가쿠노다테로 이주하기 전, 가와라다 가문은 도호쿠 동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일본 최초의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1147~1199년)로부터 하사받은 곳입니다. 그러나 가와라다 가문은 결국 아시나 가문에게 패배해 이들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아시나 가문은 아이즈, 그리고 이후에는 가쿠노다테를 관리했습니다.
가와라다 가문은 가쿠노다테의 사원과 신사를 관리하는 관청인 지샤부교의 반토 직책을 담당했습니다 지샤부교의 또 다른 업무가 도시 계획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풍수지리에 대한 지식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건물을 상서로운 방식으로 배치하면 불운을 내쫓고 자연재해를 막으며 질병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가와라다 가문의 사람들은 습지 개척에 앞장섰고 시문 등 문학 예술을 교육하는 사립 학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메이지 시대(1868~1912년) 초에 사무라이 계급이 없어지자, 가와라다 지료(1854~1902년)는 가업을 토지 매입으로 전환했습니다. 가문의 금융 자산이 크게 늘어나 이후 이들은 아키타현에서 가장 부유한 5대 가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료는 26살에 현 의원으로 최초 당선되었고 7선에 성공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가와라다 지주(1876~1928년)는 아키타의 농업, 임업, 전력 산업에 크게 기여한 기업가였습니다. 지주는 농업 학교를 세웠을 뿐 아니라 토지를 통합하고 관개 시스템을 유지하며 새로운 농업 장비를 구입하여 지역 작물 수확량을 늘렸습니다. 지주는 이후 자산 대부분을 매각하여 가와라다 수력발전소를 세워 아키타에 수력발전을 도입했습니다. 그의 발전소는 1912년 운영을 시작하여 1972년 전기 서비스로 통합될 때까지 가쿠노다테 지역의 1,237개 가구에 전력을 공급했습니다.

- 공개(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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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11월까지
- 장소
- 카쿠노다테마치 히가시카츠라쿠쵸
- 문의처
- 셈보쿠시 교육위원회 문화재산과:0187-43-3384
- 교통 액세스
- JR카쿠노다테역에서 도보로 15분정도 걸림
오다노 저택
원래 오다노 가문의 주거지였던 곳은 1900년 화재로 전소되었지만 같은 해 전통적인 에도 시대 건축 스타일로 재건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택의 박공지붕은 얇은 목재 지붕널을 여러 겹으로 겹쳐 만들어졌습니다. 배치 역시 전통적인 스타일을 따랐습니다. 현관, 위층과 아래층 거실, 안방(오카미), 손님을 접객하는 공식 공간(자시키), 가족들의 침실(나카노마), 창고(난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무라이 저택에서 본채는 정문 바로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다노 저택의 본채는 정문에서 약 20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정문에서 본채로 이어지는 일직선의 길은 도단 스쓰지(단풍 철쭉)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저택에 도착한 손님은 신분에 따라 각각 다른 문을 이용합니다. 높은 신분인 경우 왼쪽을, 낮은 신분인 경우 오른쪽 문으로 들어갑니다. 왼쪽 문에는 높은 신분의 사람을 모시는 시종이 사용하도록 작은 보조문이 있어, 시종이 이곳으로 들어가 주인이 도착했음을 알릴 수 있습니다.
오다노 가문은 무술에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실전 검술, 규도(일본 궁술), 창술 등 각종 무술에 뛰어났습니다. 저택 남서쪽 한 켠에 위치한 도장에서 검술을 비롯해 기타 무술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저택 앞에는 전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벚꽃나무 등이 줄지어 서있습니다. 농업과 산업, 번영의 신인 이나리를 모시는 오다노 가문 신사 주변을 구마 조릿대(얼룩 조릿대)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오다노 가문의 역사
오다노 가문의 역사는 사타케 가문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타케 가문은 혼슈 동부의 히다치 지방(현재 이바라키현 일부)을 통치했습니다. 가문의 창시자는 오다노 요리요시(1411년 출생)입니다. 그는 현재 히타치오미야 시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치했는데, 이곳이 오다노라고 불렸습니다. 요리요시는 오다노를 가문의 성(姓)으로 정했습니다. 오다노는 사타케 정부의 고위 관료였으며, 17세기 초 사타케를 따라 아키타로 이주했습니다.
오다노 가문의 가쿠노다테 방계는 이마미야 가문의 가신이었습니다. 이마미야 가문은 사타케의 친척으로 산악 신앙인 슈겐도의 수행자들을 관리했습니다. 그러나 사타케 가문의 기타 방계가 가쿠노다테 성 인근 마을을 통치하는 임무를 맡자, 슈겐도는 사원과 신사를 관리하는 지샤부교의 관할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마미야 가문은 아키타의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오다노 가문은 이후 사타케-기타 가문의 가신이 되었습니다. 사타케-기타 가문의 수비대로서, 국경 수비대를 이끌고 영지의 곡식 보관 창고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또한 오다노 가문은 다이가쿠노 고개를 경유해 가쿠노다테와 아니코잔 구리 광산 사이의 곡식 운송 루트 확립에 기여했습니다.
당시 학자이자 화가였던 히라가 겐나이(1728~1780년)가 1773년 아키타 방문 시 오다노 나오타케(1750~1780년)의 작품을 보게 되었습니다. 히라가는 젊은 예술가의 작품에 크게 감명을 받았고 그를 만나 그림자를 활용하고 원근법을 이용하는 네덜란드식 화법인 란가의 기초를 알려주었습니다. 다음해 나오타케는 일본 최초의 서양 의학서를 번역한 책인 가이타이신쇼(해체신서)의 삽화를 맡아 서양 스타일로 인체 해부도를 그렸습니다. 그는 일본과 중국의 화풍을 접목시키고 서양식 원근법과 음영을 활용한 란가의 아키타 학파를 창시했습니다.

- 공개(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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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11월 중순까지 오전 9시~오후 4시 30분까지
- 장소
- 카쿠노다테마치 히가시카츠라쿠쵸
- 문의처
- 셈보쿠시 교육위원회 문화재산과:0187-43-3384
- 교통 액세스
- JR카쿠노다테역에서 도보로 15분걸림
구 이시구로-게이 가문 저택
이 저택은 1935년 이시구로 가문의 딸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에도 시대(1603~1867년)에 지어진 가쿠노다테 전통 가옥 보존 지구 내의 다른 사무라이 주택에 비해 건물이 훨씬 근대적이며, 서양과 일본의 건축 요소를 결합한 전쟁 전 가옥의 형태를 잘 보여줍니다.
사무라이 저택은 일반적으로 격자형 배치를 사용해 동일한 크기의 방 네 개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접객 전용으로 사용됩니다. 접객실에는 손님이 드나들 수 있는 전용 통로가 갖춰져 있습니다. 가족의 생활 공간은 주택 뒷부분에 위치하며 별도의 출입구가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시구로-게이 저택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구분이 없으며 서양식 구조를 채택하여 가족, 손님, 하인이 함께 하나의 문을 통해 출입합니다.
응접실(갸쿠마), 서양식 거실(이마), 일본식 거실(자노마), 침실, 자녀방은 미닫이문이 아니라 벽으로 구분되며 실내 복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다미방의 구획을 나누고 외부 복도로 저택 전체를 둘러싸는 형식의 전통적 가옥과는 양식이 매우 다릅니다. 실내 장식 역시 서양과 일본의 요소를 모두 활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응접실에는 석고 천장과 퇴창을 두었고 저택 곳곳에서 스키야(다실풍의 건물) 양식의 창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시구로 게이(1929~2005년)가 가족과 함께 지바현으로 이사하면서 이시구로-게이 저택을 1999년 가쿠노다테에 기증했습니다. 저택은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보수 공사를 진행한 후, 2010년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저택의 지붕과 기초, 기타 손상된 외관을 교체하였지만 내부는 주방 등 몇몇 현대적 설비가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시구로-게이 가문의 역사
이시구로-게이 가문은 이시구로 가문의 방계입니다. 이시구로 가문은 16세기 엣추 지방(현재 도야마현)에서 가쿠노다테로 이주했습니다. 약 200년 동안 이시구로 가문은 사타케-기타 가문을 위해 가쿠노다테의 재정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전환기에 자신들의 부와 토지를 확보했습니다. 이시구로 가문의 저택은 지금도 부케야시키 거리 모퉁이에 있는 구 이시구로 게이 저택 맞은편에 있습니다.
이시구로-게이 가문은 이시구로 가문의 가까운 방계로, 에도 시대(1603~1867년) 본가에서 독립했습니다. 전통적인 친족 관계에서 가족은 부계 중심으로 구성되며, 본가와 다수의 방계로 이루어집니다. 일반적으로 본가의 가장은 장자가 승계하며, 가문의 자산과 부동산을 물려받습니다. 장자 외의 아들들은 방계로 독립합니다. 방계의 독립을 위해서는 가장이 허락해야 하며, 재정적으로 독립한 상태가 아니라면 재산의 일부를 방계에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